<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리뷰
토니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그는 "이것이 그들의 정확한 대화였을까? 거의 확실히 그렇지 않다. 그래도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그들의 대화의 가장 좋은 기억이다."라고 말한다. 결국, 우리의 인생 이야기는 완벽하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 기억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쓰여진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다 보면, 거짓된 버전을 믿게 되기도 한다. 그러다가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와서 그 이야기를 바로잡거나, 심지어 그들의 버전을 우리에게 들려주기도 한다.
불완전한 기억과 진실의 모호함
이 이야기를 읽는 많은 사람은 토니의 이야기 너머에 있는 사실 관계를 알아내고 싶은 충동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에이드리언의 자살 이유, 그와 사라 그리고 베로니카의 관계, 사라가 500 파운드를 남긴 이유, 일기장의 내용. 얄궂게도 단서가 아주 없지는 않아서 조그마한 단서들을 독자는 열심히 끼어맞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토니도 자신의 조악한 기억을 더듬으면서 해석을 하고, 그 해석으로 독자는 상상한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새로 밝혀진 사실이 있으면 이전 해석은 갖다 버리고 새로 해석을 한다. 이전 해석과 새 해석이 섞여서 뒤죽박죽이다. 그런데도 앞뒤를 잘 맞추면 이야기가 연결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하나 명확하지 않다.
이야기의 시작에 나오는 에이드리언과 헌트 역사 선생님의 대화를 곰곰히 되짚어보자. 둘은 불완전한 역사와 기록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과거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한계는 근본적이어서 문자 기록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 짧지만 강렬한 주장은 과거를 기억하는 모든 행위, 개인의 기억에도 해당한다. 토니도 예외는 아니어서 40년전에 보낸 편지도 잊고 있다가 베로니카가 건네준 편지 복사본으로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독자들은 불완전한 면이 있더라도, 기억의 파편을 모으고 모으면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진실의 실루엣이 보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은 그 희망을 산산조각낸다. 토니가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짜맞춘 이야기는 마지막에 새로 밝혀진 하나의 사실로 인해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
이야기의 마지막 직전에 토니가 추정하던 내용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자 토니가 그전까지 알던 내용이 어떻게 바뀌는지 생각해보라. 에이드리언이 말한대로 토니의 확신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었고, 새로운 증거의 등장으로 인해 깨진다. 토니는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통해 또 다른 확신을 얻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가 책을 덮을 때까지 이해하고 있는 사실은 불완전한 토니의 기억과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밝혀진 불완전한 기록을 조합한 추정일 뿐이다. 만약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 다른 증거가 나온다면 진실은 전혀 다른 국면으로 흐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베로니카가 태웠다던 에이드리언의 일기를 주기 싫어서 거짓말을 했다고 가정하자. 베로니카가 어느날 마음을 바꿔 그 일기를 건내준다면 토니와 우리가 공모하여 쌓아올린 추정의 모래성은 일기장 안에서 새로 알게되는 내용으로 허망하게 쓰러질 뿐이다.
그러면 누군가는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알 수 있느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이에 대한 에이드리언의 결론은 이렇다. 주관적 의문 대 객관적 해석의 대치야말로 역사의 중점적인 문제이다. 우리 앞에 제시된 역사의 한 단면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가가 해석한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 토니, 에이드리언, 베로니카 그리고 사라에게서 일어난 객관적 사실을 알기 위해서 토니의 주관적 해석을 들어야만 한다는 아이러니를 피할 수 없다.
주관적 해석을 굳이 피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 뿐이다. 예를 들어 사라 포드가 토니에게 500 파운드를 남겼다는 사실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명한 사실 바깥에 남겨진 미지의 영역, 500 파운드를 주려고 한 이유를 알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사람의 인지 본능은 얄궂어서 이야기에 구멍이 있어도, 그림에 모호한 모자이크가 있어도 상상을 통해 메우려고 한다. 그러나 상상은 오직 추정이다.
우리가 그렇게 불확실한 사실과 해석의 틈바구니에서 많은 질문을 마주하는 동안 이야기는 어느새 롭슨과 에이드리언의 불행한 사고로 넘어간다.
롭슨과 에이드리언의 죽음
롭슨의 자살은 에이드리언에게 일어날 일에 대한 복선이면서, 요약이기도 하다. 독자가 에이드리언이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을 잡게 해주는 표지판 역할을 하며, 토니의 기억을 통해 회고하는 에이드리언의 일을 보다 단순한 표현으로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점은 롭슨의 사건 때는 평범한 고등학생처럼 원색적인 감상을 말했던 토니가 40년이 지나 에이드리언의 사건은 보다 원숙하게 사과를 표현하는 사람으로 변화한 면모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토니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돌아보며, 자신이 다른 이의 서사, 특히 에이드리언에 대해 함부로 말한다는게 얼마나 경솔했는지 알게 된다. 이야기는 토니의 회고와 롭슨의 경우를 비교해서 보여주며 토니의 깨우침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롭슨의 이야기는 우리가 다른 이의 서사에 대해 내막을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부정확한 평가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증언과 자료가 근본적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역사가는 해석한다는 관점에서 역사에 적용해도 똑같다. 그리고 이야기는 더 나아가 그런 한계 속에서 어떤 일의 원인에 대해 말한다는 것의 허망함,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 않은 법이다.
그러므로 토니는 자신이 다른 이의 서사, 특히 에이드리언에 대해 함부로 말한다는게 얼마나 경솔한지 알게 된다. 마치 롭슨의 경우처럼, 그리고 알지 못하는 역사에 대해 논평하는 역사가들처럼. 에이드리언은 사유와 성찰을 통해 그런 결론에 도달했지만, 토니는 The Sense of an Ending이라는 제목처럼 인생의 끝자락에서 회고를 통해 같은 결론을 얻었다. 제목은 인생에 대한 회고를 의미할 뿐 아니라,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우리가 지각하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기억과 해석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제목이다. 그리고 제목의 그 과정을 이야기 앞에서 에이드리언과 헌트 선생님의 대화 그리고 롭슨의 사건을 통해 한번 설명하고, 뒤에서는 토니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한번 더 보여준다. 토니가 이 책의 첫 페이지에 서술한대로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 않은 법이다.